매년 5월 17일을 ‘IDAHO’라고 부른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아이다호>를 말하는 게 아니다. ‘국제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International Day Against of Homophobia and Transphobia)의 영어 약자를 따서 IDAHO다. 1990년 5월 17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정신 질환 목록에서 동성애를 삭제했다. 그리고 2004년 5월 17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는 미국 최초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다. 그날을 기념해 2005년부터 IDAHO가 시작됐다.
첫 해에는 50여 나라에서 기념 캠페인부터 토론회, 거리 시위, 영화제 등이 열렸고, 이듬해 유럽 의회에서는 동성애 혐오를 비난하는 결의문을 통해 IDAHO를 승인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해 전부터 IDAHO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날이 바로 5월 17일. 그러니 생각해 보자. 부끄러운 것은 동성애일까? 아니면 동성애 혐오일까?
난 어릴 적부터 이상하게도(?) 남들 같지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남자아이 같지가 않았다. 얼굴도 예뻤고(진짜로 예뻤다고!!!), 날씬했고, 요리나 뜨개질도 잘했고, 남자애들에게 인기도 많았다(진짜라니까!!!). 게다가 남자애들을 좋아하기까지 했으니 이건 뭐, 말 다한 거다. 내 생각에 나는, 동성애자로 태어나서 동성애자로 잘 자랐고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그건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전염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대한민국에서 몇 안 되는, 대중을 향해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인 나 김조광수는 어떨까? 동성애자라서 부끄러울까? 만약 지금 내게 마이크를 들이댄다면 침을 튀겨가며 말할 것이다. 동성애자라서 불편하기는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다고.
하지만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였다. 설악산 기슭의 여관 마당에서는 캠프파이어가 벌어지고 선생님 몰래 반입한 소주가 돌아서 운 좋게 나도 한 모금 마실 수 있었다. 음주(비록 소주 한잔이지만)가무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를 가로막은 녀석이 있었다. 다른 반 아이였는데, 별로 친하지는 않은 녀석이었다.
그 녀석 술을 많이 먹었는지 껄렁하게 다가와서는 대뜸 “너 잘해준다며?”라고 말하고는 나를 벽으로 밀치고 키스 공세를 퍼부었다. 무슨 소리냐고, 누가 그러더냐고 묻자 이름을 댔다. 헉, 우리 반 아이였다. 난 그 아이와 사랑하고 있다 생각했었는데 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망쳐 뛰어가는 나의 뒤통수에 대고 녀석이 소리쳤다. “더러운 호모 새끼!” 맞장이라도 뜨고 싶었지만 무서웠다. 다행히 울지는 않았으나 그때의 모멸감은 잊을 수가 없다.
<와니와 준하>의 기자 시사회를 마치고 난 후였다. 스포츠 신문의 어떤 기자가 내게 전화로 동성애자가 맞느냐고 물어왔다.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맞다고 하면 커밍아웃이 되기 때문에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난 그때 준비가 안 돼 있었다. 기자는 취조하듯 재차 물었다.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결국 아니라고 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참 많이 울었다. 거짓말을 한 게 부끄러웠고 숨기고 살아야 하는 처지가 서글퍼 울었다. 그날 그렇게 울면서 결심했다. 언젠가는 꼭 “나는 동성애자입니다”라고 커밍아웃을 하겠다고.
몇 년 전 <디 워>라는 영화를 둘러싼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해 참견을 했다가 속된 말로 ‘다구리’를 당한 적이 있었다. 광분한 이들이 블로그에 수천 개씩 댓글을 달고 이메일과 쪽지로 온갖 욕설을 보내왔다. 그 중에 제일 많은 것이 ‘호모 새끼’였다. 나의 글과 나의 행동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이야 그렇다 치잔 말이다. 거기에 왜 호모가 나오는가? 열성적인 이들은 요즘도 가끔씩 이메일이나 쪽지로 호모에 대한 응징의 글을 보내곤 한다. 참 대단들 하다. 모니터를 향해 가운뎃손가락 세우고 삭제 버튼을 누르는 걸로 끝낸다. 모멸감도 눈물 바람도 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동성애자라서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다만 그걸 숨기기 위해 거짓말하는 게 부끄러웠을 뿐이다. 이제 이성애자인 척 거짓말할 필요는 없으니 내게 동성애자라는 딱지는 더 이상 부끄러운 표지가 아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불편할 뿐이다. 그래도 다시 묻자. 부끄러운 것은 동성애일까? 아니면 동성애 혐오일까?
'광수의 모든 것 > 광수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진정 소망한다면, 10년만 하라 (2) | 2009/06/25 |
|---|---|
| 내 인생의 만화 <올훼스의 창> (0) | 2009/06/13 |
| [김조광수의 롤링페이퍼] 진짜로 부끄러운 건 뭐? (3) | 2009/06/01 |
| 대충대충 스트레스 (4) | 2009/05/17 |
| 캐스팅은 짝짓기 프로그램? (5) | 2009/04/01 |
| 늙어 감을 한탄할 때가 아니라 철없음에 쪽팔려해야 한다 (5) | 2009/03/02 |







댓글을 달아 주세요
감독님이 동성애자라는거 처음 알았네요. 평소에 리더기에 등록만 시켜놓고 새글만 읽다보니 ㅎㅎ 힘내시고 활기찬 한 주 되세요.
2009/06/01 17:20세상에 제 눈 높이로 옳다고 재단할 수 있는 것이 몇개나 있을까
2009/06/03 13:07그런 생각이 듭니다.
요즘 같은 정치상황에서도 소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저 자신 스스로가 비겁자이고 무능한자인데.. 이런 저 자신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남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란
생각이듭니다. 저는 사실 요즘 같은 시대상황에도 큰 목소리로 내 의견 조차 내지 못하는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감독님은 최소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현재 부끄럽지 않은 분입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입니다.
아, 이 글 봤어요. 무비위키에 개재되었죠. 인상 깊은 기사였고, 사람들의 생각의 객관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글이었습니다.
2009/06/10 0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