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기다리느라고 오늘 지각이야. 나중에 빵 사."
또 빵?
고딩은 고딩이다.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너, 누가 반말 하래?"
"내가."
"그냥 귀여워서 봐 준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냐구?"
"왜?"
"왜는. 데이트 할려구."
녀석, 말 해놓고는 얼굴이 빨개진다.
옆에 서 있던 여학생이 힐끔 거리지만 녀석도 나도 게의치 않는다.
녀석, 며칠 만에 이 건 또 뭘까?
가슴이 또 뛰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들키지는 말아야 한다.
아직 때가 아니다.
"음, 오늘 저녁은 약속 있는데..."
"취소하고 나랑 만나. 너랑 할 얘기 많아."
녀석, 갑자기 쎄게 나온다.
못이기는 척 받아 줄까?
"나 내려야 돼. 7시에 문화당에서 만나. 참, 너 이름이 뭐야?"
어, 내 이름?
갑자기 이름을 말하려는데 자신감이 쏘옥 작아진다.
광수라고 하기가 싫었다.
나를 여자로 착각하고 온 넘에게 "내 이름은 광수야. 1920년대에 꽤나 유행했던 이름이지."라고 말하기 싫었다.
어, 어쩌지?
녀석은 내릴 정류장이 되어서 나를 재촉한다.
뭐라 하지?
"나 진우야. 정진우."라고 말해 버렸다.
녀석은 "진우... 정진우. 이름 이쁘네."하면서 내렸고.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 녀석을 뒤로 하고 버스는 떠난다.
정진우.
그 세글자가 튀어 나온 건 다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때문이다.
정윤희를 무척 좋아하던 나는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를 감명 깊게(?) 보았고
그 후로 '꼭 정진우 감독님 같은 훌륭한 영화인이 되어야지' 했었다.
아마 고등학교 때부터 해오던 짧은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내 목도리에 내가 직접 정진우라는 이름을 수놓아 다닌 적도 있다.
돌아 보면 창피하다.
정진우.
훗날 그 이름이 이렇게 나를 창피하게 만들 줄을 그 땐 몰랐다. ㅠ.ㅠ
여하튼 그날 난 정진우가 되어 북공고 2학년 핸섬 가이와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문화당 빵은 역시 맛있다.
내가 2개 녀석이 3개를 먹었다.
녀석은 고딩답게도 쏘시지빵 같은 걸 먹는다.
난 슈크림과 단팥빵을 먹었다.
"며칠 동안 곰곰히 생각했는데, 넌 대학생이고 난 고등학생... 넌 남자 나도 남자...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다... 그런데 보고 싶다... 정말 고민 많았어... 음... 그래서 일단 이렇게 하기로 했어. 일단 사귀어 보기로. 나, 너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애."
허걱, 날 정말 좋아 한단다. 이녀석.
나야 뭐 고맙고도 고맙지만 녀석이 고딩이란 게 좀 걸렸다.
"너 고등학생이 공부 안하고 이렇게 연애질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일단, 연애질이라며 우리 사이를 공식화 하고
남자, 여자... 동성애, 이성애... 이런 건 쏙 뺀다.
그리고 녀석을 위하는 척까지.
녀석은
일단, 자기는 반에서 5등 안에 드는 공부 잘하는 넘이다...
엄마가 공부 열심히 하면서 사귀는 건 괜찮다고 했다...
자격증도 몇개는 있다...
등등등 자기 자랑을 해가며 걱정 말란다.
엄마에게는 어떻게 말했냐니까
엄마에게 내가 남자라는 얘기는 아직 안했다고
하지만 자기 엄마는 자기 편이니까 나중에 말하면 이해하실 거라고
고딩답게 순진한 소리를 한다.
그래도 괜찮겠냐고 하니까 괜찮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래, 내가 얘네 엄마까지 신경 쓸 건 아닌 것 같아 그냥 넘기기로 한다.
그리고 일단은 예쁘니까 다른 것도 통과.
그럼 일사천리 연애질로 직행하는 일만 남았다. 꺄오!!!
"나랑 사귈 거지? 정. 진. 우?"
"좋아. 너랑 사귈게. 000"
"그럼, 약속."
손가락을 내밀 줄 알았던 녀석이 쪽지를 하나 내민다.
무슨 서약서 같은 거다.
일주일에 1회 이상 만나기.
가끔씩 공부도 가르쳐 주기.
다른 사람과는 안 사귀기 같은 내용의.
또 이렇게 귀여움을 떠네.
녀석, 볼수록 이쁘다.
혹시 혈서라도 써야 한달까봐 살짝 겁을 먹었지만
녀석은 거기까지 나가지는 않았다.
녀석과의 데이트는 꽤 즐거웠다.
북한산에도 가고
어린이대공원에도 가고
롤러스케티트 타러 여의도광장에도 가고
정독도서관에도 갔었다.
가끔 공부도 가르쳐 주고 말이다.
같은 동네에 사는 관계로 우리는 동네에서도 가끔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 때는 남들 눈을 의식해서 씨익 웃는 걸로 인사를 대신 하기도 했지만
멀리서 "야, 정진우."하고 큰 소리로 부르고는 손을 흔들고 사라질 때도 있었다.
엄마와 같이 있거나 동생들과 있을 때 녀석이 그러면 진짜 곤란했다.
그래도 광수라고 말하기는 싫었다.
사실, 광수라는 이름 지금도 싫다.
특히 '광수생각'이 나온 이후로는 더더욱.
그렇게 꿈같은 우리들의 데이트가 익어가고 있을 때였다.
녀석과의 데이트가 있던 날
지금은 뉴욕에 사는 여동생의 옷을 꺼내 입고(나와 내 동생은 체격이 비슷해서 옷을 같이 입을 수 있었다. 심지어 발 싸이즈-245mm-도 비슷해서 신발을 뺏어 신을 때도 있었다)
예쁘게 꽃단장하고 룰루랄라 가는데 뒤에서
"저, 정진우 학생."하고 불렀다.
40대의 아주머니였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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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 재밌는 얘기가 될 것인가 했는데 끝을 보니 또 슬플 것 같아요 ㅠㅜ 근데 광수라는 이름에 대한 고찰이 너무 재밌어여 ㅜㅜ
2006/07/26 03:24풋풋해요ㅜ
2006/07/26 07:15상큼한 이야기~~^^재밌어요 두근두근..
2006/07/26 09:30으..끝이 예상되는..ㅠ_ㅠ 제 생각에도 슬플것 같네요.
2006/07/26 10:20끝이 예상 된다? 글쎄...
2006/07/26 12:14아..고딩 엄마가 불룬다..
2006/07/26 14:37고 담 얘기가 궁굼타... ㅎㅎ
광수형! 이제 슬슬 업자 냄새가 풍기는데...ㅋㅋ
2006/07/26 14:56독자의 심금을 풀었다 땡겼다 하는.... 아주 능숙한데.
근호 / 업자 냄새? 좀 만 더 기다려 봐... 열심히 쓰고 있으니 점점 늘겠지. 지금 1984년 이야기 쓰고 있으니까 90년대 쯤으로 오면 좋아지지 않을랑가?
2006/07/26 15:25연애하는 모습 너무 귀엽고 이쁘네요~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O^
2006/07/26 23:43아... 진우라는 대목에서 새벽 네시에 미친놈처럼 웃었어요. 크크크. 40대 아주머니의 다음 행동이 기대가 됩니다요!
2006/07/27 04:01도대체 앵무새는 어떤 영화이길래???
2006/07/27 17:52데이트 하는 장면들 정말 귀여워요. ^^ 그리고 슈크림 달콤보이, 그 분 남자답고(?) 멋지네요. 저는 돌이켜 보았을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추억을 많이 가진 사람을 부자라고 하거든요. 피터님은 틀림없이 제가 아는 큰 부자중 한분이 아니실까 싶습니다. 하지만 눈가가 시려운 추억을 많이 가진 사람은 그 반대인데 피터님은 부자 맞죠?
2006/07/27 19:23가까이 다가오는 분이 누구실지 짐작이 가는데...두근두근~...떨립니다.
짐작가...짐작가...
2008/12/08 23:39